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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박중독 Essay] Prolog : 도박에 미친자의 영혼이 나에게 빙의했다
    Essay 2025. 8. 6. 08:58

    1장. 씨앗

    오늘 날씨는 맑고, 햇살은 따갑다 못해 살이 타는 느낌이다. 엄마가 얼음을 갈아 만들어준 팥빙수를 먹고 선풍기 앞에 앉아 겨우 숨을 돌린다. 그 여름날, 나는 그저 놀고 싶었을 뿐이었다.

    "엄마! 오늘 현섭이네 가는 날이야. 용돈 좀 줘."

    "그래, 삼천 원 줄 테니 잘 놀다 와. 음료수도 꼭 챙겨가고."

    그렇게 받은 삼천 원은 몇 시간 뒤, 한 장도 남지 않았다. 판치기였다. 늘 그랬다. 한 판, 두 판, 계속 잃어가도 손은 멈추지 않았다. 언젠가는 딸 수 있을 거라는 희망. 그러나 중학교 1학년 내내, 내 용돈은 그렇게 사라져 갔다.

     

    2장. 스크린 속 도박장

    중2가 되면서 ‘리니지’라는 게임에 빠졌다. 사냥보다는 ‘슬라임 경주’와 ‘개 경주’가 더 흥미로웠다. 게임 내 돈, 아데나를 걸고 이기는 슬라임을 맞히는 일. 단순한 재미는 곧 중독으로 바뀌었다. 하루 종일 아데나를 벌어 배팅에 쏟아붓는 날들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게임이었다. 하지만 이미 나는 내 인생의 패를, 한 장씩 내고 있었다.

     

    3장. 당구장과 내기의 기술

    고등학교 1학년. 당구를 처음 쳤다. 시작은 ‘게임비 내기’였다. 잃어가며 배우는 거라며 친구들은 웃었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점점 실력이 늘고, 3구를 치게 되었을 때, 내기판은 점점 커졌다. 수만원이 오가는 판에 끼기도 했고, 결국은 다시 빈손이 되었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내기 없는 당구는 재미없었다. 쉽게 이기는 것도 재미 없었다. 간신히 이겨야 재미가 있었다. 점점 더 강한 자극을 원했다.

     

    4장. 미친 자의 각성

    성인이 되어 본격적인 투자가 시작됐다. 처음엔 주식, 그다음은 선물옵션. 작은 돈으로 시작한 투자였다. 그런데 어느 날, 월급을, 그리고 연봉을, 결국 수년치의 수입을 배팅하는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손실은 상상 이상이었다. 수천만 원을 날리고 나서야 미친 자는 겨우 잠들었다. 나는 그 미친 자가 나인 걸 알고 있었지만, 그 존재를 없앨 수는 없었다.

     

    5장. 귀환

    몇 년이 지나, 또다시 그가 깨어났다. 이번엔 스포츠토토와 스피드복권. 그가 조심스레 깨어나더니, 결국 생활비까지 건드렸다. 공격적인 주식 투자로, 저축해둔 돈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다행히도 큰 손해를 보기 전에 다시 잠재울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그 영혼은 사라지지 않는다. 도박에 미친 자는 내 안에 잠들어 있을 뿐, 결코 죽지 않는다.

     

    에필로그: 나는 도박인으로 태어났다

    나는 이제 안다. 나에게 빙의된 도박의 영혼은, 다시 깨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의지로는 그를 이길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그가 깨어날 수 없도록 환경을 설계한다.  

     ㆍ 모든 금융 계좌는 가족이 함께 확인한다  

     ㆍ 주식, 선물옵션, 배팅 사이트는 완전히 폐쇄 혹은 차단한다  

     ㆍ 복권 판매처는 돌아가는 길로 피한다  

     ㆍ 충동이 생기면, 계획된 행동을 따라간다  

    도박은 ‘정신력’으로 이기는 싸움이 아니다. 환경과 거리두기로만 이길 수 있다.

     

    부록: 청소년 도박, 침묵 속의 폭발

    요즘 청소년 도박은 상상 이상으로 심각하다. 일부는 불법 온라인 도박장을 직접 운영하고, 친구를 끌어들인다. 파생 범죄로 이어지기도 한다. 게임에 포함된 사행성 요소들도 무심코 중독을 유도한다.

    가장 중요한 대응은 환경 설계다.  

     ㆍ 용돈의 흐름을 부모가 확인하고 제한한다  

     ㆍ 소액결제, 휴대폰 결제를 통한 자금 유입을 차단한다  

     ㆍ 도박 앱, 배팅 사이트는 원천 차단한다  

     ㆍ 정서적으로 도박이 아닌 활동에 보상을 설계해준다 (취미, 운동, 관계)  

     

    나는 이 이야기를 남긴다. 누군가의 손이, 나처럼 망가져 버리기 전에. 도박에 미친 자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다시는 먹이를 주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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